| 공지사항 home > 회사소개 > 공지사항
 
 
ADMIN 2019. 11. 21.
 [스크랩] 이코노미스트 제 88호(1987년 11월 5일자) 기사
  날짜: 2002.08.22. 15:33:22   조회: 2286

《이코노미스트》제 88호, 1987년 11월 5일자, pp 98~101.


〈성공기업의 현장〉



동전계산기 생산의 마지막 작업을 손질하고 있는
第一주화계산기 제작소 근로자들


第一鑄貨計算機제작소
金在玉 사장


현대문명사회에서 동전은 화폐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첨단전자기술의 발달로 늘어가고 있는 각종 無人化시설. 이 시설을 이용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동전이다.

동전만 있으면 美國 알래스카에서 서울로 즉시 통화가 가능하고 동전만 있으면 코피, 콜라, 사이다 등 각종 음료수는 물론 심지어 라면까지도 즉석에서 먹을 수 있다.

공무원 그만두고 事業개시

지하철을 타는 데도 동전은 필수불가결이다.

이른바 인스턴트 문명의 시대에서 동전은 알파요 오메가이다. 동전은 새로운 문명사회를 여는 열쇠인 셈이다. 이에따라 동전과 관련된 새로운 산업이 유망업종으로 각광을 받게 됐다. 동정을 헤아리는 기계, 동전을 10개, 50개 단위로 포장해 주는 기계, 500원짜리 동전을 100원짜리, 10원짜리로 바꿔 주는 기계, 지폐를 동전으로 바꿔 주는 기계 등등. 이러한 기계를 만드는 산업이 유망업종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이같은 산업이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 다만 第一주화계산기제작소가 알뜰하게 사업영역을 넓혀가고 있을 뿐이다.

이 회사 金在玉사장(51)은 지난 69년 이후 18년 동안 이 업종에 매달려 왔다. 그는 교육자 집안의 태생. 부친은 고향에서 30년 이상 국민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재직했고 집안의 두 형제는 지금도 교육자로 일하고 있다. 그 역시 대학을 졸업한 뒤 63년 서울市 공무원으로 취직했다. 財物보다는 '나름대로의 할 일'을 찾는 집안의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그의 생활에 큰 변화를 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큰 딸이 집에서 놀다가 사고를 당했다.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하는데 막대한 돈이 들어갔다. 친척들의 도움으로 수술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지만 이제까지의 그의 생활에 회의가 왔다. 財物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한 만큼은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공무원으로 필요한 만큼의 돈을 얻으려면 부정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일.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새로운 인생을 계획해야 했다. 그는 사업을 생각했다.

마침 군대생활에서 美軍 카투사로 근무했을 때 보았던 슬로트머신이 떠올랐다. 슬로트머신 속에는 동전을 카운트하는 기계가 들어있다. 이 기계를 떼어내 동전 계산기를 만들면 좋은 사업이 될 듯 싶었다.

당시 은행에서는 대당 30만원 이상 하는 外製 동전계산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조그만 아파트가 1,000만원하던 때에 30만원은 엄청난 금액의 돈이었다. 조금만 싸게 만들어 몇 대만 팔아도 수익성은 보장된다고 생각했다. 당시는 행정제도가 어수룩하던 시절이었다. 주위의 동료들은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사업을 벌이는 것이 어떠냐고 했지만 '양다리를 걸치기 싫어' 사표를 냈다.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지 7년 만의 일이었다.

刻苦 2년 만에 國産化 성공

지금은 서울극장이 들어선 청계천 3가 뒷골목에 8평짜리 공장 겸 점포를 얻었다.

예나 지금이나 청계천은 萬物商이 성격을 띠고 있었다. 모든 기계부품을 구하기가 쉽고 정보를 얻기가 가장 용이한 곳이다. 그는 공원 3명을 데리고 새로운 생활에 도전했다.

그러나 사업은 생각보다 용이하지 않았다. 수요는 차치하고라도 우선 기계가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外製기계를 들여다 우선 분해를 해 보고 이것과 비슷하게 부품을 깎아 조립하는 형태였는데 아무리 부품을 뜯어 맞추어도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았다. 기것 작동이 되면 '탱크 굴러가는 소리'가 나기 일쑤였다.

2년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친척들에게 있는 돈, 없는 돈을 끌어내 500여만원을 투자했지만 별무성과였다. 간단한 기술인데 우리의 기술수준이 그 당시에는 여기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공원들과 라면 하나로 하루 끼니를 때우면서 버텨 나갔다.

2년간의 씨름끝에 제 성능의 기계가 완성되자 이번에는 판매가 문제였다. 납품처는 오로지 은행 뿐인데 실무자들이 國産기계를 도무지 믿지 않았다.

71년 某은행에 납품신청을 했다. '당연히' 美國, 日本製와 함께 결재서류가 올라갔다. 실무자들은 外製를 원했지만 결재과정에서 國産인 그의 제품이 선택됐다. 지금 國産을 안 쓰면 10년, 20년 후에도 外製를 쓸 수밖에 없는데 모자라는 기술수준은 아프터서비스로 커버하자는 한 중역의 주장으로 그의 제품이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기계 한 대에 11만원의 가격으로 납품했다. 이로서 그의 사업은 폭발적은 아니지만 착실한 성장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됐다.

71년에는 동전계산기가 수입규제품목으로 지정됐다. 미우나 고우나 國産을 쓸 수밖에 없게 됐다.

73년에는 100원짜리 종이 지폐가 없어졌다. 동전으로 대치됐던 것이다. 동전계산기의 수요는 더욱 늘어났다.

國民은행에서는 한꺼번에 20대를 발주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그의 사업체는 83년 국민은행이 지정하는 유망중소기업 1호가 됐다.

20대를 한꺼번에 만드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불량률이었다. 40대를 한꺼번에 만들어 그 가운데 쓸만한 것을 20대 고르기로 했다. 3개월간 철야작업을 계속했다.

鑄貨자동包裝機도 개발

그러나 예상보다 불량률은 더욱 엄청났다. 금형이 없는 상태에서 일일이 손으로 깎아 부품을 만들다보니 제대로 맞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이같은 '큰 일'을 치루고 나니 상당한 기술축적이 이루어지고 얼마간 자금의 여유가 생겼다.

75년 비좁은 청계천을 떠나 城東구 聖水동에 80평 규모의 공장을 마련했다. 품목도 동전계산기 단일에서 다변화를 꾀했다. 은행에서 주로 사용하는 서류운송기인 벨트컨베이어를 만들고 소형 수동식 주화계산기를 생산해 전국 체신부산하 기관에 납품했다.

77년에는 日本의 라인 세이키社(Line Seiki Co.)와 카운터 독점 공급계약을 맺고 대형 주화계산기를 개발해 79년에는 전국시장을 100% 점유했다. 동전계산기의 수요도 예전의 은행중심에서 다변화했다. 마을금고를 비롯한 새로운 금융을 포함해 운수업체, 철도청, 체신부, 슈퍼마킷, 오락실이 새로운 수요처로 등장했다. 이에 따라 공장도 지금의 聖水동2가로 확장 이전을 했다. 국민은행의 5,000만원 융자를 비롯해 1억3,000만원의 자금으로 81년에 300평 규모의 새 공장을 마련한 것이다.

사업은 계속 성장했다. 은행의 본산인 한국은행에 신형 주화계산기 31대를 최초로 납품하고 83년에는 주화자동포장기도 개발했다. 또한 83년에는 국민은행의 유망중소기업으로 선정됐고 86년에는 주화교환기와 지폐교환기도 개발했다.

이로써 동전에 관련된 모든 기계를 개발했다 그러나 문제는 시장규모이다. 우리나라의 동전교환기 수요는 연간 1,000대 규모. 이 시장을 100% 장악해도 연간 매출액은 15억원 내외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 회사의 86년 매출은 15억6,000만원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 금년부터 수출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특히 美國과 日本 등 주요 선진공업국가가 高賃金에 따른 高附加價値제품으로 업종을 옮겨감에 따라 수출의 가능성은 더욱 넓어졌다는 것이다.


동전을 계산해 포장까지 해주는 최신 기종들.

濠洲에 輸出 본격화

금년에 이미 濠洲에 샘플 형식으로 2만5,000달러어치를 수출한 데 이어 내년부터 우선 對濠洲 수출을 본격화하고 그동안 日本이 차지하고 있던 시장을 조금씩 넘겨받겠다는 생각이다. 이 계획에 따라 대량 생산을 위한 모든 부품의 몰드化를 이룩했고 수출입허가도 취득했다. 李基錫상무(52,경제학과졸), 金銅柱상무(45,麗水수산대졸), 鄭址殷공장장(43,京畿工專졸)등을 비롯한 종업원 80명의 뜻을 합치면 수출시장의 확보도 그리 어렵지 않다는 생각이다.


나의 經營哲學

事業은 한 우물 파야 성공… 正直하면 勞使마찰 없다


<金在玉 사장>


─ 동전 계산기 사업전망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한마디로 중소기업이 할 수 있는 최적의 업종입니다. 산업사회가 발달하면서 동전의 수요는 계속 늘어납니다. 계산기와 교환기의 수요는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읍니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이를 만들 수 있는 여력이 점점 없어져 갑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日本도 엔高 때문에 이 업종에서 손을 떼어야할 입장입니다. 이 때문에 일본의 어느 업체에서는 OEM방식으로 수출해달라는 주문을 했지만 저희가 거절했읍니다. 앞으로 저희 시장이 될 텐데 그들의 상표로 내보낼 필요는 없다고 본 겁니다'

─ 대외경쟁에서 기술수준이 항상 문제가 되는데 이 업종에서는 어떻습니까.
'아직까지 우리가 못 만드는 부품은 있읍니다. 그러나 1% 미만이고 이 업족에서의 기술은 이미 公知化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문제가 될 것이 없고 앞으로는 우리의 정성과 노력에 따라 시장개척의 결과는 달라질 것입니다'

─ 우선 어느 시장부터 개척하시겠읍니까.
'濠洲는 휴양지이기 때문에 슬로트머신 등이 많고 이에 따라 수요가 국내시장의 7배가 넘습니다. 우선 내년부터 濠洲시장에 주력해 연간 7,000대 이상을 팔 계획입니다. 美國과 유럽은 약간 문제가 있읍니다. 美國은 규제조치가 까다롭고 유럽은 동전의 규격이 비슷해 기술적으로 보완할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경쟁력이 우리가 뛰어난 만큼 전망은 아주 좋습니다'

─ 사업에 성공한 비결을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무일푼에서 많은 돈을 벌었다는 성공담이 여러 곳에 많이 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짧은 시간에 많은 돈을 벌었다면 막말로 사기밖에 더 했겠읍니까. 이 점에서 저는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읍니다. 그러나 저는 오랜 기간 착실히 한 우물을 파서 제 규모에 알맞는 사업체를 꾸며 왔습니다. 여기서 꼭 지적하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이 다 대통령이 되고 재벌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면 곤란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성공하는 사람도 있지만 99%가 실패합니다. 결국 실패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보다 훨씬 많습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알뜰한 계획으로 인생을 살아가야할 필요가 있읍니다. 우리나라 교육도 여기에 초점을 맞추었으면 좋겠읍니다'

─ 요즈음의 勞使분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희 회사도 이 문제에 가장 신경을 쓰고 있읍니다. 구체적인 행동은 아직 없었지만 요구조건을 계속 제시하고 있읍니다. 종업원들의 요구사항도 일 리는 있읍니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 회사 얘기는 아닙니다만 종업원 자녀 장학제도가 있읍니다. 종업원 가운데 자녀가 어려 이 혜택을 못 보는 사람이 있읍니다. 그런데 이 혜택을 못 보는 만큼 다른 혜택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런 요구는 곤란합니다'

─ 勞使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방안을 제시해 보시죠.
'아까 말씀드렸듯이 허황된 꿈을 버려야 합니다. 경영자가 떼돈을 벌겠다고 하면 무리가 따릅니다. 이같은 무리는 종업원들에게 오해를 불러 일으킵니다. 혹시 저 사람이 많은 돈을 벌어 우리 몰래 빼돌리지 않느냐고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신뢰의 바탕이 무너지고 맙니다. 경영자와 근로자 모두가 착실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韓鍾范기자〉


* 원문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느라 현행 맞춤법에 어긋나는 부분이 다소 있습니다.

LIST  MODIFY DELETE WRITE